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십일조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구약은 소득의 10퍼센트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했고, 신약은 그 외형보다 더 깊은 곳, 곧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한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무엇이었는가

히브리어 마아세르(maaser)는 "열 번째"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소득과 수확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 드렸다(민 18:21).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에, 십일조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부양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신 14:22–29는 세 번째 해에 드리는 십일조가 가난한 자,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쓰였음을 기록한다. 즉 십일조 안에는 예배와 공동체 복지가 함께 담겨 있었다.

말 3:10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된다. 문맥을 보면,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을 하나님을 도둑질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십일조가 얼마나 엄중한 언약 의무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본문을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언약 아래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신약은 십일조를 어떻게 다루는가

예수님은 마 23:23에서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신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폐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더 큰 윤리 안에 놓는다. 십일조는 충분히 이행했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비율이 아닌 방향을 문제 삼으신다.

사도 바울은 헌금에 관해 말할 때 "십 퍼센트"라는 수치를 한 번도 쓰지 않는다. 고후 9:6–7은 이렇게 말한다. "심는 자는 그대로 거두리니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것은 율법적 최소치가 아니라 기쁨의 자발성을 가르친다. 초대 교회가 물질을 나눈 방식은 행 2:44–45에 보이듯, 10퍼센트를 넘어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이었다.

히 7:1–10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린 사건을 다루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예표로 해석한다. 여기서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이는 드리는 행위 자체의 신학적 뿌리가 모세 언약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두 가지 대답이 공존한다. 하나는 "십일조는 도덕법의 일부로서 신약에도 지속된다"는 입장이다. 모세 언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드리는 원리는 창조 질서와 일치하는 도덕적 요소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십일조는 옛 언약의 시민법이었으며, 신약 성도는 비율보다 더 자유롭고 더 넉넉하게 드리도록 부름받는다"는 입장이다. 고후 8–9장이 그 근거이다.

두 입장 모두 임의적인 헌금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 다 이렇게 묻는다. 나는 내 자원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가? 십일조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지혜로운 기준이 된다. 특히 헌금 훈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신약의 방향은 10퍼센트에서 멈추지 않는다.

돈에 관한 더 깊은 질문

예수님은 재물에 관해 산상수훈에서부터 탕자의 비유까지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이것은 헌금 신학의 핵심이다. 드리는 행위는 내 마음이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바울은 딤전 6:17–19에서 재물을 선하게 쓰는 것이 "장래에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드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흘러가는 방향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복음이 십일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동기다. 고후 8:9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드리는 것은 은혜에 빚진 자의 응답이다. 의무의 냄새가 아니라 감사의 향기가 드림의 본질이다.

교회 공동체가 사역자를 지원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는 일은 모두 성도의 헌금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재정 관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드림을 미루는 것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는지의 문제다.

주요 성경 구절

말 3:10 · 고후 9:6-7 · 마 23:23 · 눅 21:1-4 · 고후 8:9 · 잠 3:9-10 · 히 7:4-10 · 딤전 6:17-19

자주 묻는 질문

구약의 십일조 규정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가?

구약의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언약 제도 안에서 주어진 규례였다. 신약은 특정 비율을 명령하지 않지만, 자유롭고 기쁘게 드리는 원리를 더욱 강조한다(고후 9:7). 많은 신학자들은 십일조를 신약 헌금의 최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지혜롭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의무의 근거는 율법 조항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도둑질하는 것인가?

말 3:8–10의 '도둑질' 표현은 언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어다. 이 구절을 신약 성도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언약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핵심 경고는 유효하다.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불신하고 재물을 우상화하는 마음의 문제일 수 있다. 정죄보다 질문이 필요한 자리다. 나는 왜 드리지 않는가?

십일조는 세전 소득에서 드려야 하는가, 세후 소득에서 드려야 하는가?

성경은 이 계산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구약의 기준은 '처음 익은 것'(잠 3:9)으로, 수확 전에 드리는 개념에 가깝다. 세전이냐 세후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마음을 다해 드리고 있는가'이다. 드리는 태도와 규칙성이 정확한 계산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다.

형편이 어려울 때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극심한 가난 중에도 '힘에 지나도록' 드렸다고 기록한다(고후 8:2–3). 그러나 같은 바울이 고전 16:2에서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드리라고 말한다. 억지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고후 9:7). 어려운 시기에는 드리는 양보다 드리는 마음과 방향이 더 중요하다. 공동체와 솔직하게 나누는 것도 지혜다.

십일조는 반드시 교회에 드려야 하는가, 선교단체나 자선단체에 드려도 되는가?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과 레위인 지원에 집중되었다. 신약에서 교회는 그 역할을 이어받는다(갈 6:6, 딤전 5:17–18). 많은 신학자들은 십일조의 기본 흐름을 지역 교회로 보면서, 추가 헌금은 다른 사역과 이웃을 위해 드릴 수 있다고 본다. 지역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적 헌신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