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
방언의 은사는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초자연적 언어 능력으로, 신약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실재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가 오늘날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주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신실하고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진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먼저 존중하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방언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방언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행 2:4). 여기서 핵심은 예루살렘에 모인 각국 유대인들이 "자기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다는 것입니다(행 2:11). 이것은 인간의 언어들—아람어, 페르시아어, 라틴어—이었습니다. 동일한 현상이 고넬료의 가정에서(행 10:46)와 에베소 제자들에게서도(행 19:6) 반복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을 가장 상세하게 다룹니다. 그는 방언을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의 목록에 포함시키며(고전 12:10, 28), 이 은사가 교회 내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균형을 잡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덕을 세우지 못하느니라"(고전 14:2, 4).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은 차라리 예언을 더 구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4:5).
그렇다고 방언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러면서 그는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결론짓습니다. 성경 안에서 방언은 무시도 우상화도 아닌, 질서 있게 사용될 실재한 은사입니다.
방언의 성격: 무엇을 위한 은사인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방언에는 적어도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영적 기도입니다. "내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방언으로 기도할 때 인간의 이성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께 도달합니다. 이 기능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둘째는 통역과 함께 회중 앞에서 사용될 때의 공적 기능입니다. 이때 방언과 통역이 함께 이루어지면 예언과 같은 교화의 효과를 냅니다(고전 14:5). 그래서 바울은 공적 예배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 통역자가 없으면 잠잠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고전 14:28).
또한 고린도전서 14:22에서 바울은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28:11-12의 성취로서, 이방 언어로 말씀하셔도 듣지 않겠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적 표적이기도 합니다. 방언은 단순한 개인 체험이 아니라 구속사 안에 놓인 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방언은 주어지는가: 두 입장의 핵심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성실한 입장이 있습니다.
은사중지론(Cessationism)은 방언을 비롯한 특정 표적 은사들이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그 역할을 마쳤다고 봅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8에서 "방언도 그치고"라는 표현은 방언이 "자동적으로 그친다"는 중간태 동사를 사용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2:20은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는데, 표적 은사들은 그 기초 공사를 위한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정경이 완성된 이후 계시적 성격의 은사들은 그 역할을 다했다는 논리입니다. 어거스틴, 칼빈, 청교도 전통, 그리고 많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입장을 지지합니다.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은 성령의 모든 은사가 주님의 재림까지 교회에 주어진다고 봅니다. 고린도전서 13:10의 "온전한 것"은 재림 때의 완성을 가리키므로, 그때까지 방언은 폐지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요엘 2:28의 예언—"너희 자녀들이 예언하며... 꿈을 꾸리라"—이 오순절로 성취되기 시작했다면(행 2:16-17), 그 시대는 재림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파, 은사주의 전통, 그리고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입장을 지지합니다.
양쪽 모두 성경을 존중하는 진지한 입장입니다. 한쪽을 불신앙으로, 다른 한쪽을 광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복음 안의 형제자매를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한 오해들을 바로잡으면
오해 1 — "방언을 받아야 성령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명확히 묻습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 답은 아닙니다. 방언은 성령을 받았다는 유일한 증거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의 성령의 열매가 성령을 받은 삶의 더 기본적인 표지입니다.
오해 2 — "방언은 무아지경의 황홀한 상태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신의 영을 제어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선지자의 영은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 14:32). 성령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오해 3 — "방언은 가장 중요한 은사다." 바울은 방언을 은사 목록의 마지막에 배치하며, 오히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권합니다(고전 14:1). 은사의 목적은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지, 개인의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준 처방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첫째, 방언을 금하지 마십시오. 둘째, 모든 것은 질서 있게 하십시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며, 그것은 사랑의 길입니다(고전 12:31, 13장).
어떤 입장을 취하든, 우리는 한 분 성령 안에서 한 몸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사역을 광고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요 16:14). 방언에 대한 논쟁이 그리스도를 가리는 연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최종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이며, 그 길에서 은사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일은 그분을 소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열린 손으로 그분의 주권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주요 성경 구절
행 2:4 · 고전 12:10 · 고전 14:2-5 · 고전 14:14-15 · 고전 14:27-28 · 고전 14:39 · 고전 13:8-10 · 요 16:14
자주 묻는 질문
방언과 예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은사인가요?
방언이 성령 받은 증거라는 가르침은 성경적인가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라고 묻고,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전제합니다(고전 12:30). 성령 받음의 더 근본적인 표지는 방언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22-23의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3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며, 이것은 방언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신자에게 해당합니다.
개인 기도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괜찮은가요?
바울은 이를 긍정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방언 기도를 많이 했고 감사했으며(고전 14:18), "내 영이 기도하거니와"라는 표현으로 개인 방언 기도의 실재를 인정합니다(고전 14:14-15). 공적 예배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했지만, 개인 기도의 맥락은 다릅니다. 개인 방언 기도는 덕을 세우는 것으로 허용됩니다(고전 14:4). 단, 이 은사를 갖지 않은 신자를 열등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8의 '방언도 그치고'는 방언이 이미 끝났다는 뜻인가요?
이 구절은 방언의 종료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맞서 있습니다. 은사중지론자들은 방언이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보며, 헬라어 원문에서 방언이 "스스로 그친다"는 중간태를 사용한 점에 주목합니다. 은사지속론자들은 13:10의 "온전한 것"이 재림 때의 완성을 가리키므로, 그때까지 방언은 계속된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성경에 진지하게 근거한 것이며, 이 구절 하나로 논쟁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